고 허수경 시인. (사진=난다 출판사 제공)
고 허수경 시인. (사진=난다 출판사 제공)

'가기 전에 쓰는 글들'(난다)은 지난해 10월 세상을 떠난 허수경 시인이 선후배 문인들에 대한 절절한 마음을 풀어낸 유고집이다.

1부는 시인이 2011년부터 2018년까지 ‘글들’이라는 폴더 안에 담아놓은 7년간의 시작 메모를 시기별로 정리했다. 2부는 시인이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2016)를 출간한 이후 타계하기 전까지 발표한 시의 모음이다. 3부는 시인이 자신의 시에 부친 작품론과 시론이다.

허 시인은 이 책에서 명징한 기억력으로 문인들과 얽힌 개인적 추억을 풀어냈다.

우선 허 시인은 자신의 시집을 만들어준 편집자이자 아끼는 후배였던 김민정 시인에 대한 고마움을 일기에 썼다.

"민정이 보내준 난다 노트 한 권을 꺼내들고 나는 쓰기 시작했다. 몇 편의 시가 나에게 남아 있는지 나는 아직 모르겠다. 가기 전에 쓸 시간 있다면 쓸 수 있을 것이다. 내일, 내일 가더라도. 그리고 가야겠다. 나에게 그 많은 것을 준 세계로. 그리고, 그리고, 당신들에게로."(2018년 4월 15일)

문단 선배인 김훈에 대한 언급도 있다.

"김훈 선배의 말들은 이제 그가 가려고 했던 모든 길을 걷다가 가고 싶었던 어떤 길에 도달한 느낌이다. 오늘 그가 운동을 하면서 전화를 했을 때 나는 그가 자신의 길을 완성하려고 하는 마지막 아주 긴 시간을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2011년 12월 3일)

김혜순 시인에 대해서는 "그녀를 생각한다. 우리 시대 최고의 시인 김혜순. 나에게 외롭지 말라고 하던 심심해하지 말라고 하던 시인. 그녀의 말들은 외로운 사람의 말, 고독한 최고 시인의 말. 나는 그녀의 말을 사랑한다."(2011년 12월 25일)고 적었다.

새 시집의 뒤표지 글을 부탁한 문태준에 대한 글도 있다.

"문태준 시인의 새 시집에 들어갈 뒤표지 글 부탁을 받고 새 시들을 받았다. 우선 일별. 통풍이 잘되는 시. 좋은 시. 좋은 시라는 모범이 될 만한 시. 문득 문태준 시인이 혹, 러시아 시인들의 시를 많이 읽지는 않았는지, 하는 생각이 든다."(2012년 1월 19일)면서 "태준의 시에서 나는 하이쿠의 냄새. 그의 시들을 읽고 난 뒤 나는 운동화 끈을 질근 묶고 들판으로 달리기를 하러 나간다. 그 냄새가 너무 좋다.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 그가 그 길로 가리라는 거. 타인을 설득하지 않으려는 시적 태도는 너무나 좋다."(2012년 1월 22일)고 회고했다.

시인은 이밖에 이성복, 최승호, 김이듬, 신용목, 박준, 이광호 등 문단 선후배의 글에 대한 느낌을 남다른 감성으로 풀어놓고 있다.

허 시인은 1964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경상대 국문과를 졸업한 뒤 1987년 '실천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이후 두 권의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와 『혼자 가는 먼 집』을 발표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독일로 유학을 떠나 뮌스터 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으면서도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등의 시집을 출간했다. 산문집과 장편소설, 번역서도 여러 권 펴냈다.

허 시인은 동서문학상, 전숙희문학상, 이육사문학상을 수상했다. 2018년 10월 3일 뮌스터에서 생을 마감했다. 지난 3일에는 북한산 중흥사와 진주에서 1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박남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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