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운드는 여전히 강렬하고 실험적…콘서트 음향 쩌렁쩌렁



가수 서태지(42)는 한국 가요계의 팀 버튼(56)을 지향하는가.

서태지가 5년 만인 20일 발매하는 정규 9집 '콰이어트 나이트(Quiet Night)'는 동화가 콘셉트다. 아이만을 위한 건 아니다. 어른이 함께 들을 수 있다. '만년 소년' 서태지가 어느덧 '아빠'가 된 모습이 투영된다.

서태지는 그래도 서태지다. '시대 유감'을 외치던 그다. 동화도 마냥 편하게 쓰지 않는다. 발매 전 '콰이어트 나이트'를 처음 소개하는 18일 밤 서울 잠실 종합운동장 올림픽주경기장 콘서트에 '크리스말로윈'이라는 타이틀을 붙였다. 크리스마스와 핼러윈의 조어다. 쉽지 않다.

그로테스크한 동화다. 주로 문학 비평 용어인 그로테스크는 '괴기한 것, 극도로 부자연한 것'을 뜻한다.

버튼 역시 그로테스크하다. '가위손' '크리스마스의 악몽' '찰리와 초콜릿 공장' 등에서 그로테스크한 동화적 상상력을 뽐냈다. '크리스말로윈' 포스터를 보면 '크리스마스의 악몽'이 떠오른다. 그로테스크한 동화이니 비슷한 분위기가 나올 법도 하다.

공연장의 분위기 역시 '크리스말로윈' 답다. 핼러윈의 심볼 거대한 잭 오 랜턴(jack-o'-lantern·속을 파서 도깨비 얼굴 모양으로 만든 뒤 그 안에 촛불을 켜 놓은 호박)을 연상시킨다. 무대 위는 크리스마스다. 크리스마스에 먹는 지팡이 모양 사탕 캔디 캐인, 눈 결정체, 붉은 지붕이 눈에 띈다. 플로어 석에는 괴물 복장을 한 이들이 2만여 팬들에게 사탕을 나눠준다.

핵심은 그런데 장식이 아니다. 음악이다. 서태지는 독특한 아이디어 속에 자신만의 개성 강한 음악을 녹여내는 장기는 '콰이어트 나이트'에서 보여준다.



◇팬들에 대한 사랑…눈시울 붉어지며 "보고 싶었어요"

서태지는 '서태지 매니아(마니아)'들에게 '대장'으로 통한다. 편안하게 반말로 대한다. 이날 4번째 곡 '버뮤다 트라이앵글'을 끝내고 말문을 열었다. 동화 속 왕자님처럼 차려입은 서태지를 향해 곳곳에서 "삑뽁이 아빠"라고 외친다. 서태지가 아내 이은성과 사이에서 최근 얻은 딸의 태명이다.

"너무 오랜만이죠. 5년 만에 제가 여러분 앞에 섰어요. 많이 기다리셨죠. 한자리에 모여 있는 여러분 보니 좋네요. 그냥 좋아요"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곳곳에서 "울지마"라고 외치자 "그런데 왜 남탕이야? 나 남자들 되게 싫어하는데"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팬들은 사전 공연 시작 시간인 오후 6시의 3시간 전부터 1만5000장 한정으로 판매하는 '콰이어트 나이트'를 사기 위해 줄을 서기도 했다.



◇'콰이어트 나이트'는 동화+실험

앞서 '콰이어트 나이트' 수록곡 2곡이 공개됐다. 지난 2일 가수 아이유(21) 버전과 10일 서태지 버전으로 공개된 '소격동'은 일렉트로닉 장르다. 몽환적인 신스팝에 가깝다. 서태지 버전은 특유의 '서태지표' 아련한 사운드가 묻어난다. 이날 아이유와 서태지가 첫 듀엣 무대를 선보였다. 아이유의 청아한 목소리, 서태지의 미성이 어우러지면서 순결한 느낌이 도드라졌다.

12일 공개된 타이틀곡 '크리스말로윈'은 하우스 비트를 기반으로 트랩, 덥스텝 장르에서 주로 사용되는 그로울(Growl) 등 다양한 실험적 사운드로 구성됐다. '삑뽁삑뽁'이라고 들리는 사운드는 트로트를 연상케 한다. 혹자는 일렉'트로트'닉이라는 수식을 붙이기도 했다. 이 곡의 목소리의 주인공인 아역배우 엘리(6)가 이날 무대 위 대형 잭 오 랜턴 속에서 깜찍하게 앉아있기도 했다.

이날 신곡 4곡이 추가로 공개됐다. '숲속의 파이터'는 마치 롤플레잉 음악 같다. 밝고 통통 튄다. 서태지는 "동화, 아닌 동요 같은 곡"이라고 소개했다. 일부 반복되는 리듬은 '북 치는 소년'을 연상케 해 캐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팬들이 보기에 무대의 오른쪽에서 공연장 반대편 위로 연결된 와이어를 타고 사슴 인형이 이끄는 대형 썰매가 날아가기도 했다.

또 다른 신곡 '잃어버린' '프리즌 브레이크' '나인티스 아이콘'은 실험적인 사운드가 인상적이었다. 사이키델릭한 사운드는 미국 사이키델릭 록밴드 '엠지엠티(MGMT)'를 떠오르게도 했다.



◇시간을 뚫는 추억의 노래

이날 공연의 첫 곡 '모아이'(8집)를 시작으로 '내 모든 것'(서태지와아이들 1집 '난 알아요'), '시대유감'(서태지와 아이들 1996년 싱글(본래 실릴 예정이던 4집에는 노랫말이 사전심의에 걸려 연주곡만 수록), '너에게'(서태지와 아이들 2집), '널 지우려 해'(서태지와 아이들 3집), '인터넷전쟁'(6집), '해피엔드'(7집), '컴백홈'(서태지와 아이들 4집), '교실이데아'(서태지와 아이들 3집), '하여가'(서태지와 아이들 2집)를 거쳐 앙코르곡 '테이크파이브'(5집)까지…. 서태지의 곡들이 새삼 명곡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최근 힙합 신에서 가장 뜨거운 래퍼인 스윙스(28)와 바스코(34)가 지원사격한 '컴백홈' '교실이데아' '하여가' 무대는 '린킨파크' '림프비즈킷'을 연상케 하는 강렬한 '하이브리드 메탈' 무대였다.

여전히 인기를 끄는 1990년대 가수들의 노래는 시간을 견디거나 시간을 함께하는 음악이다. 역시 90년대 화룡점정한 서태지의 음악은 시간을 뚫는다고 느껴질 만큼 강렬하다.

서태지는 지난해 신드롬을 일으킨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4'로 다시 한 번 회자됐다. 그룹 '타이니지' 멤버 도희가 '서태지 빠'인 '조윤진'으로 나왔다. 서태지는 드라마에서 서태지와 팬(조유진)이 얽힌 '꼬깔콘 일화'는 "원래 새우깡이었죠"라고 웃었다. "우리의 별이었던 스타들과 여러분의 인생도 저물어가고 있죠. 한물간 별 볼 일 없는 스타가 들려드린다"면서 '나인티스 아이콘'을 부른 그는 애잔함을 느끼게도 했다.



◇역대 최강 사운드

올림픽주경기장은 사방이 터져 있는 만큼 사운드의 균형을 잡기 힘든 곳이다. 이날 '크리스말로윈'의 사운드는 그러나 흠 잡을 곳이 없었다. 중간에 마이크가 혼선되면서 잡음이 순간 들리기는 했으나 최근 콘서트에서 이처럼 질 좋은 사운드를 듣기는 힘들었다.

세계적인 사운드 디자이너 폴 바우만이 사운드 디자이너로 참여했다. 사운드 설치 개수는 무려 130대. 이 중 36대는 그라운드 서브 우퍼로 입체감을 극대화했다. '크리스말로윈'에서 일렉트로닉 성향이 강해졌어도 서태지의 기반은 록이다. TOP(기타), 강준형(베이스), 최현진(드럼), 닥스킴(키보드) 등 '서태지 밴드' 멤버들의 강렬한 사운드는 공연장을 뒤흔들었다. 다만 이 때문에 미성의 서태지 목소리가 묻힌 점은 아쉽다. 길이가 80m에 달하는 화질이 선명한 초대형 LED를 비대칭으로 설치한 점도 장관이었다.

주요 팬들은 어느새 30~40대가 됐다. 최근 아이돌 팬들만큼 반응이 격하고 목소리가 크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속의 열정은 여전했다. 옆에 자녀를 데리고 있어도 노래가 나오면 10대로 돌아간다.

남편과 두 자녀인 딸(9)·아들(4)과 공연장을 찾은 이은미(35·경기 시흥) 씨는 "저처럼 서태지도 자녀가 있다는 사실에 감회가 새롭다"면서 "그래도 여전히 서태지는 서태지"라고 말했다. 그녀의 딸은 아이유 팬이다. "아이유가 서태지와 함께 노래한다고 해서 딸도 기대를 많이 했다"고 웃었다. 서태지가 모녀의 세대 차이의 간격을 줄여준 셈이다.

90분간 진행된 '크리스 말로윈'에서 서태지는 '숲 속의 파이터' 같았다. 최근 자신을 둘러싼 온갖 구설과 루머 속에서 음악으로 맞서는 듯했다. 신비주의가 퇴색됐어도 서태지는 서태지다. 서태지는 결국 음악으로 말하고 말해야 한다. 그로테스크한 동화는 시대 유감을 말하던 '문화대통령'이 '시대공감'을 노래야 하는 아빠가 된 서태지가 선택한 최대치다. 버튼이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면서 순수함을 유지하듯이, 이는 '조용한 밤'(콰이어트 나이트)에 가능한 결과물이다.

마지막 두 곡은 '하여가'와 '테이크 파이브'다. "나는 기다려 네가 다시 돌아올 날까지 이곳에서"(하여가), "내겐 좋은 사람이 많다고 생각해 / 쉽지 않은 건 같은 자리에 있었어 / 맘속 가득한 진실을 느끼고"(테이크파이브). 묘하게 연결되는 이 두 곡은 서태지와 팬, 그리고 음악의 상관관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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