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은 기자) 어떤 대상의 특성을 여러 측면에서 비교, 분석할 때, 그 기준을 축으로 육각형 이미지를 그린다. 이것을 '헥사곤 그래프'라고 한다. 그래프에서 모든 기준 축이 끝까지 꽉 차면 정육각형으로 보이기 때문에, 육각형은 종종 '완벽한 모습'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요즘 20~30대 젊은 세대에서는 이 육각형의 완벽을 갖춘 인간형을 추구하는 경향이 관찰된다.

넷플릭스 드라마 '셀리브리티'
넷플릭스 드라마 '셀리브리티'

변화하는 우리 사회 '유명인 담론'

넷플릭스 인기 드라마 <셀러브리티>에는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주인공 서아리의 학창 시절 친구인 오민혜와 관련된 에피소드다. 오민혜는 소셜미디어 최고의 셀럽이면서, 연매출이 수십억 원에 이르는 유명 패션 브랜드를 운영하는 사업가다. 그런데 무엇 때문인지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사실을 숨기고 마치 부잣집 딸이었던 것처럼 과거를 포장한다. 그러다 우연히 주인공을 만나 거짓말이 들통날 상황에 처해 곤란을 겪는 내용이다.

서아리가 서술하는 오민혜에 관한 폭로글 내용은 이렇다. “제목: ㅇㅁㅎ의 찐 과거를 폭로합니다. / 금수저에 엄친딸은 쥐뿔. 고딩 때 무존재감 쩔었어요. 아버지가 축산 가공업하는 사업자라고요? 4차산업 시대엔 정육점도 축산업이라고 하나요.ㅋ”

중산층 가정 출신이라는 사실이 숨기고 싶은 과거라는 드라마 설정은 지금 우리 사회의 '유명인 담론'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예전에는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가진 것 없이 맨손으로 시작했지만 남부럽게 성공한" 인간 승리형의 서사를 선호했다. 그렇다면 오민혜는 자신이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사실을 오히려 자랑해야 맞는데, 그는 왜 이런 과거가 폭로될까 봐 전전긍긍 하는 것일까?

#육각형여자, #육각형남자, #육각형연예인, #육각형아이돌, #육각형브랜드, #육각형운동선수, *육각형미드필더····. 최근 SNS 인기 검색어 중에서 '#육각형OO'이란 표현을 쉽게 볼 수 있다. 아이돌 그룹 아이브의 안유진 씨가 대전 축구경기장에 시축자로 등장했을 때, 장내 캐스터는 그를 “보컬, 댄스, 비주얼, 예능, 리더십, 축구 사랑까지 못하는 것이 없는 육각형 연예인, 안유진”이라고 소개했다. 소개팅 대상자를 남들에게 소개할 때 "OOO 씨는 외모, 패션 센스, 운동신경, 인성 등 정말 뭐 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육각형' 남자입니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육각형 개발자』라는 책도 나왔다. 여기서 저자는 코드 개발과 기본 IT 기술은 물론이고 팀을 이끄는 리더십과 소통을 위한 글쓰기 역량 등을 두루 갖춰야 진정한 개발자로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제 ‘육각형'이라는 말은 거의 모든 직군에서 자연스럽게 쓰이고 있는 추세다.

완벽한 육각형인간
완벽한 육각형인간

모든 측면에서 완벽을 선망하는 경향

부자라도 돈만 많으면 안 되고, 생계가 아닌 자기 발전에 기여하는 일을 하면서 부를 창출해야 남들의 부러움을 받는다. 가수라면 가창력만 좋아서는 안 되고 인성도 좋고 부유한 집안에서 사랑받으며 자란 티가 나야 한다. 이처럼 외모, 학력, 자산, 직업, 집안, 성격, 특기 등 모든 측면에서 ‘완벽’을 선망하는 사람들의 경향을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에서는 '육각형인간'이라고 이름 붙였다.

육각형인간 트렌드는 구체적으로 몇 가지 흥미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첫째, 육각형인간은 아무나 될 수 없는 것이라며, 달성하기 힘든 엄격한 기준을 제시해 일종의 '담쌓기'를 시도한다. 즉,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요소보다 운명처럼 타고나야 하는 요소를 더 높게 평가한다. 요즘 젊은 세대의 관심을 끄는 웹툰이나 드라마를 살펴보면 '고진감래의 서사'는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 그냥 날 때부터 완벽한 주인공이 바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더 인기가 높다. 

둘째, 육각형에 얼마나 가까운지 그 가치를 '숫자'로 계량화하고 수치를 서로 비교해 서열을 매긴다. 출신 학교, ·주거지, 직장의 등급을 세밀하게 나누며 순간마다 서로를 평가해 줄을 세운다.

마지막으로 육각형인간 되기를 희화화해 놀이처럼 즐긴다. 이른바 '육각형게임'을 통해 어차피 이룰 수 없는 선망이라면 가볍게 가지고 노는 모습이다.

금수저 흙수저
금수저 흙수저

완벽한 자아 추구냐, 계층 고착화를 드러내는 절망이냐

육각형인간은 양면적이고 논쟁적인 트렌드다. 젊은 세대는 바로 공감하지만, 기성세대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젊은 세대에서도 모두 따르는 메가트렌드라기 보다는 일부에서 관찰되는 서브트렌드이기도 하다. 

완벽한 자아를 추구하는 열정을 붙어 넣는다는 긍정적 시각도 있지만, 노력으로 해결되지 않는 완벽의 추구에 절망할 수 있다는 부정적 시각도 공존한다. 어쩌면 "나 오늘부터 ‘갓생’ 살 거야" 식의 놀이에 불과할 수 있고, 현대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계층 고착화라는 사회적 문제를 보여주는 빙산의 일각일 수도 있다.

현재 대한민국 20~30대는 단군 이래 가장 높은 소득과 교육 수준을 갖춘 ‘행운의 세대’로 일컬어진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경제성장 속도의 둔화로 눈높이에 맞는 기회가 줄어들고 있는 가운데, 각종 소셜미디어를 통해 '만인이 만인과 비교되는' 시대를 살고 있기도 하다. 

언제 어디서 나를 지켜볼지 모르는 익명의 타자들과 무한 경쟁을 벌여야 하는 젊은이들의 삶의 무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무거운 현실이다. 완벽해 보이는 타인과의 끊임없는 비교를 통해 육각형의 자아를 추구하는, 적어도 육각형으로 보이고자 노력하는 육각형인간 트렌드는 그 압박을 견뎌야 하는 일부 젊은이들의 활력이자 절망이면서 하나의 놀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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